생각하고 벌다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6월 26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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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해답을 구하기 위해 친구에 대해서 정 채봉님의 에세이 중에서 "보물"이란 글을 먼저 써 볼까 합니다.

'에이즈라는 병아십니까? 불행하게도 당신이 감염되었군요.'

인터폰을 들자 담당 의사가 나왔다.

'당신에게는 단 한 사람만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얼마 후 의사로부터 통보가 왔다.

'당신 집에 핵탄두가 투하된 것 같군요.

당신이 지상에 없는 것으로 알겠다는 연락입니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의사로부터 다시 통보가 왔다.

‘미안하지만 절망했다는 그분의 말밖에는 전해 드릴 수가 없군요.’

이제 딱 한 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나는 친구를 생각해냈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전화번호를 말했다. 이내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친구의 목소리였다.

'나는 너를 믿는다. 절망하지 마, 내가 있지 않아.'

흐느끼는 나를 흔드는 손이 있었다.

눈을 뜨자 산벗나무 아래에서 친구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잠이 쉽게 들다니 놀랐다. 자, 이제 산을 내려가야지.'”

자, 어떻습니까? 친구에 대한 정의가 됐나요?

진정한 친구란 이렇듯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웃입니다.

나의 글 중에서 가장 모티브가 되어주는 이 친구를 말하기가 조금은 두렵습니다만,

어느 날 이 친구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녁에 식사를 함께 하자고요.

그 말은 술이 마시고 싶다는 말입니다. 제가 술을 안 하니 이 친구 늘 술 마시고 싶으면 이렇게 말을 던집니다. 식사를 하면 저는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밥보다 술을 많이 먹습니다. 제가 술을 못하니 저와 술 마시자 하면 늘 사양했으니까 밥을 먹자고 하는 것입니다.

밥은 제 입으로 들어가고 술은 친구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안주 삼아 밥과 여러 가지 찬을 먹습니다.

그러다 술이 좀 거나해지면 속내가 조금씩 나옵니다.

여러 가지 말이 있긴 합니다만 저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벌다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그 친구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숨겨놓은 말 못하는 사연들이 술의 힘을 빌려 제게 토해 놓습니다.

때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가며 얘기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에 고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담아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저도 어찌나 가슴이 저며 들었던지 못하는 술을 조금 마셔보기도 했으니까요. 무슨 서두가 그리도 쌀 서 말처럼 기냐고요? 마음이 짠~한 이야기니까 그렇지요. 제가 그 친구에게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지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어요.

아무튼 친구란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니까 속내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응어리가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이 친구 말을 끄집어냅니다. 이 친구 형제가 7남매인데 식구가 많다 보니 자랄 때는 많은 식구들 때문에 먹는 것부터 고생을 많이 하고 컸습니다. 공무원인 아버지 벌이로는 감당이 어려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학교는 대충 다들 고등학교까지는 나왔는데 큰 형만 빼고는 대학을 들어갈 형편이 못 되어 취직자리로 옮겨서 집안 살림을 보태고 있었답니다. 큰 형은 장남이라 큰 학교(대학)를 가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그 형만 대학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직장을 잡아서 벌다 보니 형편도 조금씩 괜찮아지고 그러고 세월이 지나다 보니 결혼 적령기가 되어 시집 장가 들 생각들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 친구를 그렇게 고등학창 시절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난히 노래를 잘 하는 것이 서로가 통하여서 저와 함께 음악부서에서 특별활동도 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일본 엔가를 그렇게 잘 불렀습니다. 구성지게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헤어졌습니다. 한참 뒤 세상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난 후 동창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친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잘 나가고 있더군요. 종업원 200명이 훨씬 넘는 전자회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자주 만나 좋은 시간들을 많이 보내곤 했었으니까요.

이 친구 가족이 많았습니다. 7남매였으니까요.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두 분, 그리고 아래로 남녀 동생 각각 한 사람씩 있었답니다. 집이 가난했을 땐 모두 한 방에서 기거했는데 차츰 풀리고 나서는 큰 집을 장만하여 남자 여자 각기 방들을 쓰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 친구 사업이 잘 되었을 때부터 부모님을 자신이 모시게 되었다 합니다. 결혼해서 분가한 형, 누나 모두 집 사는데 큰돈을 보태어 드리고 동생 둘은 데리고 있었답니다. 물론 그 친구 아내가 위로 시부모님 모시고 아래로 동생들 돌봐주느라 고생을 좀 했다는군요.

그러다 동생들도 혼기가 차 다들 결혼을 시켰답니다. 지가 형편이 제일 나았고 부모님들은 별로 벌어놓은 돈도 없던 터라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합니다. 지가 형편이 잘 나았고 부모님들은 별로 벌어놓은 돈도 없던 터라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합니다.

결혼 비용을 대고 집 얻는데 조금씩 돈을 마련해 준 다음 부모님만 모시고 살았답니다.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설마 했습니다. 그렇게 친구가 무너지리라고는 도무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경리에 밝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누구보다도 꿰뚫고 있는 사람인데 참 알 수가 없더군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친구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빈 생각하고 벌다 털털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동안 어려움을 호소해서 힘껏 도우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어려운 줄은 입 무거운 친구로부터 듣지 못했거든요.

갈 곳이 없어져버린 친구가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형제들 모두 그 친구에게 돈을, 혹은 보증을 섰기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를 피할 곳이 없는 친구를, 아내더러 친구 아내에게 의논하라고 하여 조그만 방을 마련해주고 우선 그리로 이사를 하게한 다음 친구는 법적 조치에 대한 수속을 하고 생각하고 벌다 한 달을 가 있었습니다.

그간 아내에게 친구 아내가 받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여 늘 친구 아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했습니다. 보기보다는 담대하게 잘 견디는 것을 보고 역시 친구 아내라 인정했습니다.

친구 아이들은 다들 학생이었는데 잘 참고 생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모시고 계시던 부모님은 동생네 집으로 가 계셨는데 그 때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 동생 저 동생 집으로 옮겨 다니며 정착을 못하는 노인네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고 그때부터 어머님 문제로 동생들과 사이가 좋지를 않았나 봅니다.

더군다나 형제들에게 여러 가지 못할 일을 많이 저질러 놓은 탓에 더더욱 그렇게 되어버렸답니다. 결국은 서울 맏형네로 옮겨 보내고는 이 친구 서럽게 울더군요. 서울로 가시기 싫어하시는 어머님을 등떠밀듯 보내는 마음이 그렇게 아렸나 봅니다.

비오던 날의 추억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생각하고 벌다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생각하고 벌다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난 ‘쟁이’지,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그간 생각하고 벌다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 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 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 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쪼’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막걸리 세 통 들고 나타난 그
자신 드러내길 병적으로 혐오해온
학전 대표, 연출가
그가 발가벗는 심정으로 나왔다

15년간 관객 71만명 끌며
매표수입 100억 넘긴
4000회 끝으로 돌연 중단 선언
대신 10년째 청소년·아동극에 공
“세상엔 돈 안돼도 해야 할 일 많아”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 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 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 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이라든가 ….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은 그러나 2008년 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생각하고 벌다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 저,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 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 시리즈로 을, ‘학전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만8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 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천~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노래로 그린 거지. 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내 몸서 나간 ‘아침이슬’ ‘상록수’
나간 것 백배가 돼 돌아와 버거워
1987년 시청앞 이한열 노제때
백만명 부르는데 앗, 뜨 그런 느낌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말의 생동성 처음 깨우쳐준
김지하에게 무한한 고마움 가져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는 전혀…
나와 무관하고 영향 준 바도 없어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 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眞)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생각하고 벌다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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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꿈이 당신의 정체를 바꾼다! 조국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가는 미국 태생의 소설가 더글라스 케네디를 대표하는 『빅 픽처』. 빼어난 착상 위에 반전을 거듭하는 폭발적 흡입력의 스토리가 생생한 유머와 위트와 함께 펼쳐져 유럽을 사로잡은 스릴러 소설이다. 변호사 '벤'에서 사진가 '게리'로 살아가게 된 한 남자의 일상 속으로 초대한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일탈을 꿈꾸고는 하는 우리를 완전한 몰입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특히 벤이 잃어버린 꿈으로 인해 고독과 슬픔, 방황과 일탈에 빠져든 모습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를 비춘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생각하느라 밤마다 잠을 설치는 우리에게 섬뜩한 긴장감을 안겨주고 있다.

미국 뉴욕 주 월가의 변호사 '벤'은 아름다운 아내 '베스'와 함께 '애덤'과 '조시'라는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벤은 어린 시절부터 사진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변호사가 되었다. 베스는 벤을 마치 벌레라도 본 듯 피해다니기 바빠 그의 일상은 지쳐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베스가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벤은 게리네 집에 찾아가 말싸움을 벌이던 중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했다. 요트사고로 위장하여 게리의 시신을 불태운 다음, 몬태나 주 마운틴폴스로 도망친다. 남은 생애를 게리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는 젊은 시절에 접어버린 사진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벤이 찍은 인물 사진이 지역 신문에 실리면서 비밀이 드러날 위험에 처하는데…….

저자 : 더글라스 케네디
1955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으며 열 권 이상의 소설과 다수의 여행기를 출간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영국에서 주로 살고 있다. 조국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작가로 유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특히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2006년에는 프랑스문화원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2009년 11월에는 프랑스의 유명 신문인《피가로》지에서 수여하는 그랑프리상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왜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에 열광할까? 외면적으로는 그가 정치적으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소설 전반에 녹아 들어있는 박학다식한 면모, 등장인물에 대한 완벽한 탐구, 대자연에 대한 신비롭고 장엄한 묘사, 풍부한 예술적 소양이 크게 어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지로의 다양한 여행 경험이 작가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 픽처》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대표작으로 그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영화화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 《The Dead Heart》,《The Job》,《A Special Relationship》등이 있으며 격찬을 받은 여행기로 《Beyond 생각하고 벌다 생각하고 벌다 the Pyramids》,《In God's Country》등이 있다.

역자 : 조동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번역가와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프랑스 스타일》, 《미러스케이프》, 《정키》, 《싱글맨》, 《신사 고양이》, 《심플 플랜》, 《매일매일 아티스트》, 《일상 예술화 전략》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카메라를 수집했다. 외할아버지가 은퇴해 포트로더데일의 콘도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탁자에 놓인 낡은 브라우니 카메라를 보았다.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카메라를 수집했다. 외할아버지가 은퇴해 포트로더데일의 콘도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탁자에 놓인 낡은 브라우니 카메라를 보았다.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생각하고 벌다 살짜리 꼬마를 가장 크게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 -12p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성취’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미, 즉, ‘큰돈을 벌다’라는 뜻으로 통했다. 백만 달러 단위의 연봉. 계급 사다리의 맨 위쪽에 오르거나 안정적인 전문직에 뛰어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돈. 나는 아버지가 제안한 로스쿨 예비과정을 마쳤지만(틈을 내 사진 수업도 들었다), 마음속으로 늘 다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더 이상 생활비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성취’라는 말과 완전 작별하겠다고. -26~27p

한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가 8시 30분 직후에 현관문이 열렸다. 게리가 고개를 비죽 내밀고 길을 면밀히 살피더니, 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포커스 링을 돌려 초점을 맞췄다. 바로 그때 아내가 문간에 나타났다. 게리가 내 아내를 끌어당기더니 진하게 키스했다. 아내는 한 손으로 게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게리의 청바지를 입은 엉덩이를 꽉 쥐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면서도 뷰파인더에서 고개를 돌렸다. 모터드라이브가 서른여섯 번 찰칵거리기까지는 6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억지로 고개를 다시 카메라로 돌리자 두 사람이 포옹을 풀고 있었다. 아내는 초조한 표정으로 우리 집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우리 집 응접실 커튼 뒤로 비치는 불빛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아내는 고개를 돌려 게리를 보았다. 아내는 게리의 입술에 마지막으로 길고 진한 키스를 하고, 텅 빈 도로를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아내는 성큼성큼 걷는 사이에 저녁 산책을 나온 이웃과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125p

계단을 내려갈 때 게리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의 반이 보였다. 나머지 반은 리놀륨 바닥에 맞닿아 있었다. 한쪽 눈이 유리구슬처럼 차갑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제 피는 멈춰 있었다.
시체로 다가가 바닥에 엎드린 채 목에 박힌 병의 일부를 잡고 홱 잡아당겼다. 그러나 병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등뼈나 근육에 꽉 끼인 듯했다. 한 번 더 세게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게리의 목 전체가 병과 함께 들려 올려졌다. 손을 놓자 게리의 머리가 바닥을 꽝 소리가 나게 찧었다. 병을 살짝 돌리며 뽑으려고 해 보았다.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왼발로 게리의 머리를 누르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침내 병이 뻑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150~151p

근처에 다른 배는 없었다. 시야가 미치는 곳 저 멀리까지 다른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쌍안경으로 해변을 살폈다. 주립공원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여름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여름에는 달빛 아래에서 핫도그를 먹는 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피서객들로 붐빌 테니까. 다행히 오늘밤에는 달도 없었다. 내게는 어둠이 절실히 필요했다.
조심스레 돛을 내리고 갑판으로 내려갔다. 이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하나하나 차례대로 하면 돼’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258p

월스트리트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가 대서양에서 요트 화재와 폭발로 사망한 지 12일이 흐른 지금 뉴욕 주 경찰 수사관은 네 가지 사망 원인을 제시했다.
뉴욕 주 경찰의 자넷 커트플리프 대변인이 오늘 기자들과 만나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블루칩 호의 잔해를 철저히 감식한 결과, 이 사건의 수사는 이제 종결짓기로 했으며…….’
내가 학수고대했던 기사였다. 이제 깨끗하게 해결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일주일 동안 더 고속도로에서 헤맸다. 갈 곳도 없이. 뿌리도 없이. 떠돌이로. -273p

출판사 서평

더글라스 케네디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현재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나고 자란 곳은 미국, 현재 머무르는 곳은 영국의 런던, 그의 책이 가장 잘 팔리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기이하게도 조국인 미국보다 .

더글라스 케네디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현재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나고 자란 곳은 미국, 현재 머무르는 곳은 영국의 런던, 그의 책이 가장 잘 팔리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기이하게도 조국인 미국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인지도가 높고 독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그러나 이 소설 《빅 픽처》 만큼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30여 개 국에서 출간돼 크게 각광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몰입도 최고인 이 소설에 대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는 게 두려울 만큼 흥미진진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의 호평을 기반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완전한 몰입의 세계로 인도한다. 작가의 문체는 생생하고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넘친다. 그러면서도 섬뜩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 만큼 스릴이 있으며, 책에서 시종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되기를 갈망한다. 오래도록 품었던 꿈과 전혀 별개인 일과 생활에 빠져 사는 사람, 현재 주어진 여건 때문에 혹은 바쁜 일상에 매몰 돼 꿈이 바래가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또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은 가슴에 사무칠 만큼 절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벤 브래드포드 역시 그런 사람이다. 앞날이 탄탄하게 보장된 뉴욕 월가의 변호사, 안정된 수입, 중상류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교외 고급 주택 거주, 미모의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둔 가장……. 겉모습만 보자면 모두들 부러워 할 대상이지만 벤 자신은 조금도 즐겁지 않다. 벤의 오랜 소망은 사진가가 되는 것이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동안 느꼈던 희열이 사라진 지금 그의 꿈은 값비싼 카메라와 장비들을 사들이는 호사스런 취미로 남았을 뿐이다.
벤의 자괴감은 아내 베스와의 결혼생활이 삐거덕거리는 상황과 맞물려 점점 더 위기상황을 향해 치닫는다. 카탈로그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미모의 아내 베스는 작가의 꿈이 좌절된 책임을 온통 벤의 탓으로 돌린다. 벤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기회를 놓치게 된 탓에 전업주부로 눌러앉게 되었다는 게 베스의 불만이다. 점점 잦아지는 부부 싸움,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는 일, 그 어디에도 더 나은 생을 위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던 한 남자 이야기!
벤과 갈수록 사이가 멀어지던 베스는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혼외정사에 탐닉한다. 벤은 우연히 베스가 이웃집 남자 게리의 집에서 불륜행각을 벌이고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날 밤, 게리의 집을 찾아간 벤은 말다툼 끝에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한다. 앞날이 탄탄하게 보장된 변호사 신분에서 일급살인을 저지른 범법자가 된 벤은 완전범죄를 기도한다. 요트사고를 위장해 게리의 시신을 소각하고 사건을 은폐한 벤은 남은 생애를 게리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도주의 길에 올라 몬태나 주 마운틴폴스에 정착한다. 심심풀이로 마운틴폴스의 토착인물들을 사진에 담았던 벤, 우연히 그 사진이 지역 신문에 게재되면서 그는 일약 유명 사진가가 된다. 그러나 매스컴의 취재 요청이 쇄도하고, 온갖 신문 및 잡지에서 작업의뢰가 몰려들면서 그는 숨겨진 과거가 발각될 위기에 처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구성에 5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내용이지만 손에 집어 드는 즉시 단숨에 읽어나갈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작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을 한데 섞고 버무려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넓은 의미로는 스릴러 범주에 드는 소설이지만 작가의 예술에 대한 심미안, 사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음미해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작가는 사진 촬영 및 현상, 인화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에 필적할만한 지식을 자랑한다.
벤에게 주어진 제2의 인생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마운틴폴스에서 시작된 앤과의 로맨스의 결말은?
독자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에서 도무지 벗어날 기회를 찾기 힘들 것이다. 뛰어난 스릴러이면서 현대사회를 깊이 있게 조망한 이 소설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주인공 벤의 잃어버린 꿈, 고독과 슬픔, 방황과 일탈의 모습은 절망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국적과 성별, 세대와 관계없이 깊숙이 빠져들어 읽게 되는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이 소설에 대한 영화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프랑스 판 소설 제목인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가 영화 제목으로 쓰인다. 로맹 뒤리스 주연에 까뜨린느 드뇌브가 출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벤의 아이러니한 삶을 어떻게 그려낼까? 작가의 소설 중에서는 《데드하트 The Dead Heart》가 이미 영화화 된 바 있다.

《빅 픽처》에 대한 언론 서평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는 게 두려울 만큼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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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무서운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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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글재주 덕분에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내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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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스토리, 세련되고 재미있는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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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긴장…… 더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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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켜서 눈을 뗄 수 없는 스릴러!
-〈GQ〉

밀리언셀러를 바라는 출판인에게는 꿈같은 작품. 전개가 빠른 스릴러이며 현대사회를 깊이 있게 통찰해 스릴러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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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완성도, 빠른 전개, 스릴 만점 소설.……지루해할 틈이 없을 만큼 풍부한 재미를 갖췄다. 케네디는 그야말로 빼어나고 위트가 넘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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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게 현실적인 심리적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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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는 강약과 긴장을 조절하는 데 매우 뛰어난 감각을 지닌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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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서스펜스 소설 중 《빅 픽처》보다 뛰어난 작품을 아직 보지 못했다.
- (아일랜드)

뛰어난 이야기, 빼어난 문체
- (아일랜드)

마지막 장까지 계속 빨리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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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문장

강경모 님 2014.03.13

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하기를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강경모 님 2014.03.10

다른 벽면에는 인물사진들을 걸어놓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서 보이는 다양한 표정들을 빌 브란트 스타일로 찍은 사진들이다. 조명기기를 쓰지 않고 조리개를 열어, 조금 거친 질감과 자연스러운 톤을 그대로 살린 사진들.

최진희 님 2013.12.08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벤 브레드포드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내 베스는 작가의 꿈을 포기한채 주부로서 살아갔다. 그것이 그녀의 삶을 천천히 조여갔다. 벤은 살인을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몬타나에 도착했다. 자신의 과거를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처절한 과거를 가진 이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그 사랑은 삶의 희망을 갖도록 해준다. 사랑은 위대한 힘이 있다. 주인공인 벤,게리,엔드류. 그는 앤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그의 삶 전부를 바꿔놓았다. 세 명의 모습으로 살았던 그가 가장 원했던 삶은 누구였을까? 싫증나는 고액연봉 변호사로 일하며 상류층의 삶을 살지만 끊임없이 아내와 갈등했던 벤 브래드포드. 사진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자신의 애인에게 조차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가진 게리 서머스.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육아생활을 도맡아 살고 있지만 아내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 엔드류 타벨.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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